[요약] 특히 올해 주목을 받은 단어인 ‘몰아 보기[binge-viewing]’는, 단순히 새로운 시청 행태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미디어 소비의 시간적∙장소적∙선택적 자유를 확대하려는 경향에 대응하는 새로운 유통 방식의 실험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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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디넷코리아에 기고한 컬럼임. 아래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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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최근 ‘몰아 보기[binge-viewing]’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에서 고른 올해의 단어 후보(최종 선정 단어 ’selfie’외 7개) 중에도 ‘binge-viewing’이 있었다. 이미 90년대부터 사용되었던 이 단어가 올해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넷플릭스가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등 오리지널 드라마의 시즌 전체 에피소드를 동시에 출시하면서이다. 보통 미국 드라마가 일주일 단위로 방영하고, 온디멘드(on-demand) 비디오도 현재 방영 중인 시즌은 일부만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참작하면, 넷플릭스의 시즌 전체 동시 출시는 파격적이었다. 같은 뉴미디어인 아마존도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오리지널 드라마를 출시하기로 한 것을 보면, 넷플릭스의 결정이 과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닐슨의 조사에 의하면 넷플릭스 이용자의 88%는 몰아 보기(하루 3편 이상의 에피소드 시청) 경험이 있다. 비단 올해 들어서 갑자기 생긴 경향이 아니다. 뷰비쿼티의 조사에 의하면, 이미 2012년 미국 시청자의 56%는 몰아 보기 성향을 갖고 있었다.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의 드라마 몰아 보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온디멘드 뿐 아니라, 드라마 여러 편을 연달아 편성해 내보내는 케이블 채널도 있고, 심지어는 오래된 드라마 전체를 요약해 주는 프로도 있다.
‘몰아 보기’는 이미 온디멘드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슨 대단한 경향인 양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상이 아니라 전략이다. 단순히 몰아 보기의 시청 형태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현상에 부응하는 새로운 미디어 ‘유통 방식’을 넷플릭스가 과감하게 시작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넷플릭스가 간파한 것은, 사람들이 몰아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컨트롤’, 즉 자유다. 넷플릭스의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는 이것을 책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200년 전엔, 많은 소설이 잡지에 기고되었다. 그건 연작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책 생산 비용이 충분히 낮아지면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책을 만들어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 모든 장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컨트롤을 갖게 되었고, 책은 이제 구식이 된 잡지의 연재 모델과의 경쟁에서 크게 이겼다. 그리고 우리는 [비디오에서도]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소비자들은 점점 더 컨트롤을 원할 것이란 거다. 그들은 자유를 원한다.
소비자에게, 대중에게, 더 많은 자유와 자율을 주는 것은 시대적 현상이다. PC와 인터넷이라는 도구는 대중에게 미디어 제작과 유통의 자유를 주었듯, 미디어의 소비도 마찬가지로 자유를 지향한다. 이런 소비의 민주화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첫째는 시간적 자유이다. 일정한 시간에 특정 프로그램을 시청해야 하는 환경에서, 원하는 시간에 시청할 수 있는 권리가 소비자에게 주어진다. 이를 위한 온디멘드 환경은 이미 보편적이다.
둘째는 장소적 자유이다. 어디서든 시청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그 첨병에 있는 무기이다. 앞으로도 미디어 소비 환경은 고비용의 빅 스크린에 집중되기보다는 다양한 퍼스널 스크린으로 분산되는 방향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리게 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누구보다도 많은 플랫폼을 지원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술 회사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선택적 자유이다.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자유는 풀어야 할 족쇄가 많다. 아직 TV 카르텔은 완전한 접근 자유를 주고 있지 않다. 복잡한 매체∙지역 윈도(window)별 홀드 백(hold back) 정책-판권 지연 정책-을 통한 매출 극대화 공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특히 지역적 홀드 백은 요즘 같은 글로벌 인터넷 시대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지만, 여전히 가장 큰 장애물이다. 또한 불법 복제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넷플릭스에도 쉽지만은 않은 문제다. 단순한 비디오 유통이 아니라 가입자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사업 모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에 진출한다면, 큰 차별화 포인트는 바로 오리지널 드라마의 미국-한국 동시 개봉이 될 것이다.
‘몰아 보기’ 단어를 주목하게 한 넷플릭스의 시즌 전체 에피소드 출시 전략도 결국 소비자에게 주는 선택적 자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몰아 보기’ 행태의 고객 니즈를 쫓겠다는 것이 아니다. 기존 TV 산업도 시청자에게 더 많은 선택적 자유를 주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컴캐스트 같은 케이블 회사도 온디멘드 라이브러리를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MTV나 디즈니 같은 TV 네트워크는 방영 전의 새로운 쇼의 전체 에피소드를 자사의 앱을 통해 TV 방영 전에 미리 공개하는 실험도 한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소비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난 시즌 따라잡기[catchup]를 한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최신 시즌으로 유입되면서 시청률이 크게 향상된다. ‘브레이킹 배드’의 마지막 시즌 시청률이 전년보다 배가 된 것은 넷플릭스의 덕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돈이 되면 다툼도 있다. 미국의 경우, 방송 중인 시즌에 대한 TV 네트워크의 온디멘드 권한은 보통 최신 5편의 에피소드로 제한되어 있다. 최근에 이것을 전체 에피소드로 확대하는 권리[in-season stacking rights]를 스튜디오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매 영향력이 높아진 넷플릭스가 스튜디오에 해당 드라마 지급 인하 압박을 하고 있다. 해당 온디멘드가 다른 곳에서의 노출이 많아질수록 자신들에겐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다.
소비의 민주화라 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소비자의 권력이 배제된 힘겨루기라는 생각이다. 물론 넷플릭스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moments of truth]’의 경쟁을 위한 당연한 대응일 것이다. 소비자가 소비를 결심하는 그 결정적 순간에, 더 광범위한 선택적 자유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선택을 당하게 되어있다.
좌우간, 그런 경쟁을 하다 보면, 모두 자기 패를 다 까발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소비자가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 선봉에 넷플릭스가 있다. 한국은? 사전 제작 시스템은 엄두도 못 낼 한국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넷플릭스의 월 $7.99보단 한참 모자란 월 4,900원짜리 푹에서 운 좋게 우연히 발견한 ‘모래시계’를 ‘몰아 보기’하는 것도 썩 괜찮은 ‘선택’ 같다.
이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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