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이냐 경험이냐

여러분은 디바이스를 선택하는 기준이 뭔가요? 대부분은 성능일 것입니다. CPU, 메모리, 해상도…. 하지만 요즘은 ‘경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특히 애플의 아이폰, 아이패드는 성능보다는 경험을 강조하는 디바이스의 대표 주자입니다. 그럼, 디바이스 선택의 기준도 바뀌었을까요? 아뇨. 여전히 디바이스의 성능 지수가 중요한 선택 기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작은 설전이 있었습니다. 제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성능이냐, 경험이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경험 때문에 제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답은 경험이 아니라 성능이 맞습니다.

 

소비자 선택의 기준은 계량화된 ‘성능’

그 이유는 계량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능 지수는 쉽게 수치로 계량화가 됩니다. 계량화되지 않은 ‘경험’은, 경험해보지 않는 한 그 좋고 나쁨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막연히 소비자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경험’을 얘기하는 것보다는 성능 지수를 얘기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성능 지수도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디바이스의 처리 속도는 지연을 경험해 본 소비자에겐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메모리가 모자란 경험을 해 본 소비자에겐 메모리의 양이 중요하고, 낮은 해상도에 불만족했던 소비자에겐 높은 해상도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좀 더 ‘경험’의 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멀티 터치라든지, 자이로스코프라든지 하는 스펙을 내세우면, 그것을 선험한 소비자에겐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될 수 있겠죠.

성능 지수의 기준은 말하자면, 소비자의 검증된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말인즉, 이미 소비자로부터 선택을 받을 만큼 혁신적인 선도 제품이 있었다는 얘기죠. 예를 들면, 컬러TV나 노트북, 아이폰 같은 선도적 제품을 따라 시장이 형성됩니다. 이 시장의 팔로워들은 선험된 선도 제품을 벤치 마킹하고, 더 나은 제품으로 승부를 합니다. 이미 소비자들이 경험한 제품의 좋고 나쁜 점이 다음 제품의 성능으로 표현됩니다. 예를 들면, 속도가 더 빠르다, 해상도가 더 높다, 등. 이제는 성능 경쟁이 됩니다. 즉, 성능 경쟁에 돌입하는 제품은 이미 시장에 정착된 폼팩터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성능 경쟁은 어느 순간 의미를 잃고 맙니다. 기술을 한 회사가 독점하지 않는 한 성능만으론 차별화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성능 경쟁은 이제 거의 무의미해집니다. 네가 HD면 나도 HD고, 내가 128G면 쟤도 그렇고, 누가 멀티 터치면 누구나 멀티 터치가 됩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습니다. 소비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성능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저것이 성능이 좋다면, 그쪽에 눈길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시장은 과열됩니다. 성능 경쟁은 이제 잉여 경쟁으로 치닫습니다. 성능을 위한 성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쿼드코어 프로세서, 풀 HD, 1,300만 카메라의 스마트폰. 85인치 UHD TV.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을 성능들이 소비자를 현혹합니다. 제가 그런 성능 경쟁을 잉여 자원이라고 비판도 했었지요.

하지만 재밌는 건, 이런 성능 마케팅은 여전히 소비자에게 먹힌다는 겁니다. 왜? 그게 계량화의 힘이죠. 소비자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게 정말 필요한 자원인지 아닌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스펙이란 기술 환상이 있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긴 아닙니다. 저에게 선택하라고 해도, 항상 최선은 최고의 스펙입니다. 기술의 발전이란 항상 그런 원동력 때문에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은 어떤 포화 한계선에 수렴하게 됩니다.

사업자로선 성능 경쟁에 큰 차별화가 없어지고 시장은 마케팅 전쟁터가 됩니다. 마케팅에 누가 얼마의 돈을 쏟아 붓느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집니다. (물론 그 어마어마한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됩니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입니다. 중국의 저가 제품들이 거의 똑같은 스펙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마케팅 비용에 가격 경쟁력 싸움까지 해야 합니다. 수익 구조의 미래가 불안합니다.

 

혁신의 모멘텀은 ‘경험’

이제 다시 새로운 ‘경험’을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멋진 디자인? 새로운 인터페이스? 기가 막힌 서비스? 하지만 이 새로운 경험들은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량화되질 않습니다. 소비자 다수에겐 잘 전달되지도, 감흥을 얻지도 못합니다. 수백, 수천 명의 인력을 투입해 밤낮없이 제품을 개발해도 시장의 반응은 차갑습니다.

이 순간 절실한 그 무엇, 그것이 시쳇말로 ‘혁신’ 코드입니다. 아이폰 같은 그런 멋진 한 방 말이죠. 혁신은 성능 위주의 기술 발전에도 새로운 경험의 퀀텀 점프를 가능케 합니다. 예를 들면, 모뎀 칩 업그레이드만 생각하던 휴대폰 기술 발전이, 멀티 터치 인터페이스라는 새로운 기술 발전의 영역으로 전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폰이 혁신 코드가 없는 그저 그런 폰이었다면, 그 멋진 기술인 멀티 터치는 새로운 시장을 열진 못했겠죠.

새로운 경험 계량화를 위한 혁신 코드가 없으면,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소비자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준비도 안 되어 있으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 결정적 선택의 기준이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더라도 그걸 어떻게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요. 소비자들은 어떻게 사용해 보지도 않고 그걸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알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요. 복불복. 과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혁신 마케팅에 현혹되어 제품을 사용해보고, 그것이 정말 혁신적인 제품이었을 때 비로서 시장이 문을 열겠지요. 하지만 그런 가정도 혁신적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 말이 되는 얘깁니다.

 

‘경험’ 측정의 관문은 생산 소비자 – 컬트 소비자

그럼 혁신적 제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최초의 논쟁, 소비자의 선택 기준이 ‘성능’이냐 ‘경험’이냐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서두에 얘기했듯이 소비자의 선택 기준은 분명 ‘성능’이 답입니다. 그 이유는 소비자가 ‘경험’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경험’에 대한 정보는 누가 갖고 있을까요. 바로 만드는 사람들이죠. 소비자들은 모르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그 ‘경험’을 정말 속속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걸 만들었으니까.

이 말인즉슨,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기준은 ‘성능’이 아니라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시장에는 세 종류의 소비자가 있습니다. 제품을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가 있고, 혁신적 제품을 찾아 헤매는 컬트 소비자-얼리어답터, 전문 기자, 블로거-가 있고, 제품을 만드는 생산 소비자가 있습니다. 제일 관문인 생산 소비자-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소비자로서 스스로 혁신적인 제품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컬트 소비자들이 그 제품에 열광하게 되면, 일반 소비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혁신적 제품은 "경험", 팔로워 제품은 "성능"이 기준.
혁신적 제품은 “경험”, 팔로워 제품은 “성능”이 기준.

그러니, 제가 앞선 논쟁에서 ‘경험’을 강조했던 것은, 말하자면 컬트 소비자로서의 소신을 말한 것입니다. 사실은 복불복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 컬트 소비자죠. 일반 소비자에겐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검증된 ‘성능’ 지수가 중요한 기준 요소가 됨은 물론입니다.

 

[게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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