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당하다(Netflixed)

[요약] ‘넷플릭스 스타트업의 전설[Netflixed]’이라는 책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넷플릭스와 블록버스터 간의 치열한 전쟁의 기록이다. 자본에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었겠지만 블록버스터는 그 때문에 파괴적 넷플릭스를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넷플릭스가 운도 좋았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그 유명한 개인화도 요금제도 밑바탕엔 다 그 자본의 논리가 깔렸다. 자기 소멸적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로, 언제가는 넷플릭스도 넷플릭스 당하게(netflixed)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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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flixed

‘넷플릭스(netflix)’를 동사로 쓰면 무슨 뜻일까? 사울 캐플런(Saul Kaplan)은 이렇게 정의한다.

넷플릭스하다 (netflix)

  1.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붕괴하거나 어지럽히다
    (to cause disruption or turmoil to an existing business model)
  2. 이전의 성공적 비즈니스 모델을 파괴하다
    (to destroy a previously successful business model)
  3. 가치가 현재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획득되는 방법을 폐기하다
    (to displace the way value is currently created, delivered, and captured)

이 동사의 기원이 되기도 한 대표적인 사용 예문이 바로, “블록버스터가 넷플릭스 당했다(Blockbuster was netfliexed)”이다. 저널리스트인 지나 키팅(Gina Keating)의 2012년 책을 한역한 ‘넷플릭스 스타트업의 전설’의 원제가 ‘넷플릭스 당하다(Netflixed)’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동사의 기원이 되었던, 블록버스터가 넷플릭스 당하는 그 처절했던 10여 년의 기록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넷플릭스의 영웅담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무능해 보였던 블록버스터도 내부적으론 정말 치열했고, 거의 넷플릭스를 뒤엎을 수도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결론은 역시 현실은 실력만이 아니라 운도 필요하더라.

아이디어는 어쨌든 실행을 해야 빛을 발하는 법이며, 성공을 위해서는 수많은 ‘안되는 이유’를 타파해가야 한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1997년 당시 이미 스타트업 하나를 성공적으로 엑시트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고, 기존 비디오 대여점을 대체할 아직은 생소한 매체인 DVD 우편배달에 기회를 봤다.

헤이스팅스가 일단 주머니에 회사를 판 돈이 있었기에 뭔가를 더 할 마음이 생겼겠지만, 그게 그저 돈을 편하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모한) 도전을 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미 대부분 사람이 비디오 대여점을 사용하는 시장에서, DVD 플레이어 보급률도 출시된 타이틀도 지극히 저조한 상황에서, 누구도 해보지 않은 방식인 위험에 노출된 우편 배송을 이용한 사업을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비디오 시장 수요는 이미 검증되어 있다.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지만 블록버스터 등 기존 대형 업계가 안정적으로 사업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대여점을 찾아가야 하고, 반납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연체료를 물어야 하는 불편에 대한 개선 여지가 분명했다. 여기에 파괴적인 포인트가 있었다. 기존 업체의 사업 기반인 대여점을 붕괴시키고, 매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던 연체료를 폐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존 업체가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역할이 스타트업의 몫이다. 스스로 부정할 기반이 없이 새롭게 시작하는 스타트업이 베팅을 해야 할 바로 그 부분이다. 그것을 넷플릭스는 무모하게 도전을 했다. 그럼 기존 업체들은 파괴될 운명만을 갖는가? 슬픈 얘기지만, 대부분 그렇다. 생명의 주기가 있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죽는다) 다만 위기를 극복하여 얼마나 더 오래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위기의 순간에 가장 합리적으로 내리는 경영 의사 결정이 파괴적 기술 앞에서는 가장 바보 같은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넷플릭스가 회사를 블록버스터에 넘기려 했을 때 몇 번이고 거부했다. 앞으로의 시장 경쟁 가능성을 평가 절하한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대응하려 했을 때는 모기업이나 투자자의 입김으로 새로운 사업에 투자 자원을 적극적으로 할당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오프라인 매장과 블록버스터 온라인의 가입자를 통합한 통합 회원제[Total Access]라는 기가 막힌 한수로 가입자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며 넷플릭스를 벼랑 끝까지 몰았던 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기업사냥꾼인 아이칸이 이사회와 CEO를 자기 사람들로 심으면서 그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쪽 세계에 문외한인 새로운 CEO가 온라인 사업 투자를 줄이고 오히려 기존 대여점을 부흥하는 정책을 미는 바람에 스스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오프라인 시장도 이미 키오스크 방식의 레드박스가 틈새를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어쩌면 이윤 극대화라는 당연한 자본의 논리가 기업이 가지는 태생적 자기 소멸 메커니즘일지도 모르겠다. 넷플릭스도 예외는 아니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블록버스터를 물리치고, ‘포천’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하는 등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아마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론 언젠가는 털어내야 했을) DVD 대여 회원제에 대한 요금 조정과 ‘퀵스터(Qwikster)’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DVD 사업 부분을 분리하려 한 성급한 의사 결정은 큰 반발을 불렀다.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는 논리는 언제나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넷플릭스의 그 유명한 추천 시스템을 봐도 그렇다. 넷플릭스는 영화를 수만 가지 장르로 구분하여 개인화를 한다지만, 그 원래 목적은 넷플릭스의 빈약한 라이브러리에 있었다. 최신작들 위주로 구비하기엔 비용과 재고 부담이 너무 커서, 잘 안 알려지거나 철 지난 타이틀 위주로 재고를 소비시키는 방법으로 개인화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재론 래니어(Jaron Lanier)가 지적했듯이 이런 방식의 자기충족적 빅데이터(넷플릭스가 찍어주는 콘텐트를 소비하는 행태가 재축적되는 빅데이터)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볼만한 콘텐트도 없는데 개인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문제는 약간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지만 하고 넘어가자. 물론, 얼마 전 지인과의 대화 주제이기도 했는데, 개인의 취향이라는 게 과연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지인이 전해준 말처럼,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취향이라고 믿도록 하는 게 대중의 취향일 수도 있다. 내 생각엔 결국 그것은 사회관계적인 문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회관계 안에서 자신의 취향을 결정한다. 공유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그 만족감은 떨어진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 굉장한 비디오와 밋밋한 비디오를 시청하는 그룹을 나누고, 굉장한 비디오를 보는 사람은 그 내용을 공유하지 못하게 하고, 밋밋한 비디오를 시청한 그룹은 그 내용을 공유하게 했더니, 만족감이 후자가 더 크더라는 것이다.

결국, 각자 개인들이 자기만의 딱 맞는 콘텐트만을 보는 것이 진정한 개인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대표적인 콘텐트가 최신 히트작이다. 사람들이 그런 콘텐트를 주로 찾는 이유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그런 콘텐트들을 끌어모으는 게 쉽지 않다면, 가지고 있는 빈약한 라이브러리를 가지고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던지, 아니면 스스로 히트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마도 넷플릭스의 결정은 후자가 된 듯하다. 오리지널 콘텐트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넷플릭스의 위상은 HBO와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다시 본래 문제로 돌아와서, 다른 예도 보자. 퀵스터 사태 이후에도 어떻게든 요금제를 손보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소비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조정하는 방식을 시험하기도 한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논리가 바로 자기 소멸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파괴적 기술이 나타나도, 기존 자본의 논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의사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할 것이다. 바로 블록버스터처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게 흥미로운 드라마이긴 하다. 이 책이 마치 한편의 미드를 재밌게 감상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가 지향하는 가치 중에는 희망적으로 들리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소비자의 ‘결정적 순간[moments of truth]‘에 대한 고민이 그런 것이다. 그런 근본적인 지향점을 중심축으로 굳건히 가지고 간다면 넷플릭스도 꽤 오래갈 것이다.

하지만 언젠간 넷플릭스도 넷플릭스 당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 선배들처럼.

 

이윤수

 

  • 트위터 검색을 해보니, 대중적으로는 ‘netflix’를 동사로 쓰는 경우 주로 ‘넷플릭스를 보다’,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아래 트윗처럼.

4 Comments

    • “Cooney G., Gilbert D. T. & Wilson T. D.(2014), The Unforeseen Costs of Extraordinary Experience, Psychological Science”입니다. 대니얼 길버트 교수가 교신 저자로 되어있는 논문입니다. 참고하십시오.

  1. 포스팅에서 느껴지는 깊이, 통찰력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갑니다! 좋은 글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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