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폰(Vodafone) 웹박스(Webbox)는 TV에 연결하는 키보드 일체형인 일종의 인터넷 어댑터입니다. 이런 폼팩터가 요즘은 드물지만, 퍼스널컴퓨터가 태동하던 1980년대에는 최첨단 트렌드의 한 축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TV UI의 접근법으로서 꽤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어, 주목해야 할 한 사례로 기록해 보고자 합니다.
보다폰(Vodafone) 웹박스(Webbox)는 TV에 인터넷을 연결하여 다양한 웹 컨텐트를 제공하는 장치입니다. 말하자면, 요즘 많이 나오는 TV 어댑터들, 박시(Boxee), 로쿠(Roku), 나아가 애플 TV나 구글 TV 같은 일명 OTT(Over the top) 박스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장치입니다.
보다폰 웹박스가 이런 OTT 박스들과 차별화가 되는 것 중 하나는 키보드 일체형의 폼팩터에 있습니다. 키보드는 확장된 서비스를 고려하는 TV 인터페이스에서는 영원한 숙제 같은 존재입니다. 키보드를 주자니 너무 덩치가 크고, 안 주자니 불편하고, 그렇습니다. 키보드 일체형은 어찌 보면 어차피 줄 키보드라면 본체하고의 결합을 통해, 부가적 장치가 주는 부담 절감과 심리적 공간 효율성, 단순함 등으로 어필을 하려는 일종의 트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폼팩터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런 폼팩터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이미 1980년대 초에 퍼스널컴퓨터가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시절에 ZX 스펙트럼(ZX Spectrum)이나 코모도어 64(Commodore 64) 같은 키보드 일체형 컴퓨터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코모도어 64 같은 경우는, 그 향수를 되살려 아톰 CPU로 재무장한 복제품을 올 6월에 새롭게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 4월에 출시된 영국 싱클레어 社의 ‘ZX 스펙트럼’ (왼쪽), 1982년 8월에 출시된 미국 코모도어 社의 ‘코모도어 64’ (오른쪽) |
보다폰 웹박스가 OTT 박스와 구분이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웹박스가 실은 OTT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웹박스는 인터넷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보다폰의 2.5G/EDGE 이동통신망을 이용하는, 엄연한 망 종속적 박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접속성은 웹박스를 설치적인 면에서 더욱 단순한 장비로 만드는 큰 역할을 합니다. 일반적인 OTT 박스의 경우, 이더넷 포트나 와이파이를 위한 무선 AP 같은 인터넷망 접속에 대해 고민하고, TV에 연결하고, 키보드와 연동 세팅하고 하는 일련의 꽤 복잡한 설치 작업이 필요한 데 반해, 웹박스는 그저 키보드 뒷면에 심(SIM) 카드를 꼽고 TV에 비디오 컴포지트 선만 연결하면 되는 더이상 단순해질 수 없을 정도의 간단한 설치를 가능케 합니다.
마치 키보드와 케이블만 들고 다니다가 아무 스크린에나 연결하면 바로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그런 개념이지요. 이것을 조그만 모니터에 장착한 모습을 보면 80년대 비디오텍스 더미 터미널이었던 미니텔(Minitel)을 연상케 합니다. 90년대에 KT의 전신인 한국통신이 전화국을 통해 공급한 더미 터미널은 전화선 모뎀을 통해 PC 통신(하이텔)에 접속하는 텍스트 기반의 단말로, 전화 가입자가 신청하면 무료로 배포를 해주던 그런 것 말이죠. 말하자면, 웹박스는 좀 더 현대적인 의미의 더미 터미널의 개념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더미 터미널이 전화선이라는 통신망을 사용했듯, 보다폰 웹박스도 이동전화 통신망을 사용합니다. 차이는 유선이냐 무선이냐 정도?
작은 모니터에 연결한 웹박스(왼쪽), 1982년 출시된 미니텔 1(오른쪽) |
웹박스는 2.5G라는 그리 높지 않은 망 속도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비디오 컨텐트를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인 여느 OTT 박스와는 달리, 웹박스는 보다 가벼운 웹 컨텐트의 소비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메일, SMS, 웹 브라우징, 간단한 게임 등 비교적 가벼운 애플리케이션들을 담고 있습니다. (플랫폼은 안드로이드 2.1 기반입니다.)
메인 메뉴 | 이메일 |
SMS | 게임 |
뮤직 플레이어 |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
오페라 미니 웹 브라우저 |
요즘 같은 초고속 인터넷 세상에서 이런 서비스는 어찌 보면 가당치도 않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서비스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보다폰 웹박스의 타겟 시장은 바로 그런 서비스가 필요한 제3세계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올 2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처음 출시가 되었고, 이번에 인도에 진출한다고 하는군요. 12G의 데이터를 포함한 가격이 5000~6500 루피, 원화로 12만~15만 원 정도로 책정될 것 같다고 합니다. 좀 비싼 듯 하지만, 초고속망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제3세계에선 어느 정도 어필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TV에서의 부가적 서비스의 수준에 따라 하드웨어의 스펙과 네트워크의 성능이 결정될 것입니다. 이 부가적 서비스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그래서 기본적인 플랫폼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TV는 메인 서비스가 아무래도 방송과 비디오가 될 것이고, 부가적인 서비스는 상대적으로 틈새적이거나 캐주얼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게임을 고려하자면,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긴 하죠.) 정말 캐주얼한 틈새를 메워주는 역할 이상을 차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굳이 억지스러운 성능 스펙을 가져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표 시장과 포지셔닝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폰 웹박스의 전략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제한적인 성능과 UI의 단점이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런 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아울러, 생각해보면, TV 스크린의 부가 서비스라는 것이 TV 스크린만의 것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첨비(Chumby) 類라고 부르는 탁상 스크린이나 세컨드 스크린으로서의 큰 잠재력을 지닌 태블릿 類의 킬러 앱들의 영역이 TV의 부가 서비스와 거의 중복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TV 부가서비스의 N 스크린 확장은 아마 그런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PC나 모바일이 아니고.)
[게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