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화의 한계: 프라이버시, 그리고 “미묘함”에 대하여.

산업 혁명이 기계화의 변혁이었다면, 작금의 정보 혁명은 디지털화의 변혁입니다. 우리는 가히 혁명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큰 격변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디지털화되고, 모든 것이 다 전선위에 올라갑니다. 우리의 오감은 0과 1의 정보 홍수를 감지하고 걸러내는데 온 힘을 쏟아 붇고 있는 것 같은 지경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변화에 지쳐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아침, 잘 자고 일어났지만,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면 한번 의심해 보심이)

디지털시대, 가장 어려운 숙제 중 “개인화”에 대해 소고해 봅니다.

디지털시대, 가장 어려운 숙제 중 하나는 “개인화”

삶을 편하고 즐겁게 하자는 디지털에도 pain point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바로 원하는 것을 쉽게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내가 바로 원하는 것”이라는 이슈에 대한 해답은 최근의 web2.0이다 long tail이다 하는 IT 트렌드를 보면 그 방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needs 그룹이 활성화되고 주목받는다거나, 소비자 자신이 컨텐츠를 만들어낸다거나, 네트워크 관계를 형성해 컨텐츠를 공유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바로 개개인이 다양하게 원하는 바를 긁어주는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쉽게 찾아낸내기”라는 이슈는 어떠한가요? 글쎄요, 제 경험상으로는 이것이 (현재로선) 정말 pain point입니다.
“개인화”라는 화두가 등장하게 된 연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개인의 취향에 꼭 맞는 컨텐츠나 서비스를 원하는 때와 장소에 잘 전달해 준다는 것이 “개인화” 또는 “맞춤형” 서비스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 얘기일까요?
조금 먼 미래에는 물론 가능할 겁니다. (물론,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우울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가들이 나타나주었기 때문에 희망을 가져봅니다.)
하지만, 현재의 수준에서 보자면, 당장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로 “프라이버시”와 “미묘함”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줘, 하지만 내 마음을 읽지는 마.

“프라이버시”는 말하자면 신성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사람들은 노출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정보가 노출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한없이 약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약점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본능입니다.
물론, 블로그, 미니홈피 등 외부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행동도 있습니다만, 그건 스스로 정화(淨化)시킨 내용들에 한합니다.치부는 절대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에 맞는 컨텐츠나 서비스를 제공하자면,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뭘 좋아하는지를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 때마다 일일이 이게 좋으냐 뭐가 좋으냐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소비자들이 귀찮아 하겠지요.
이 시점에서 소비자와의 타협이 필요합니다. 개인 신상과 취향을 빽빽히 적게 하고 이에 따라 판단하여 좋아할만한 서비스를 제공해줍니다. 현재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정보들 자체도 *최소한*으로만 공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기반의 자동화, 개인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미묘함” 때문입니다.

 

새콤 달달한 오렌지를 달라고 했지, 누가 이렇게 시큼 털털한 걸 달라고 했냐?

사람들의 취향은 까다롭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입맛에 맞추다 보면, 직원식당의 대량 생산 밥맛과도 같이 맛깔스러움이 사라집니다. 그럼, 개개인, 또는 소수 그룹별로 맞춤형 밥을 지어줄까요? 시골 동네 식당 정도의 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4천만 국민, 아니 66억 지구인을 상대로 하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담고 계시다면 이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의 취향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변하기도 합니다. 평소 헤비메탈을 즐겨 듣는 사람이 비오는 날 슈베르트 가곡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도 자신이 슈베르트 가곡을 들으면서 이렇게 센티멘탈해질지 상상도 못했을지도 모르는데요?
이 “미묘함”이라는 것이 정말 디지털로 정복될 수 있는 것일까요? Sci-Fi에 나오는 인공지능 로봇이 과연 이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을까요?
이 “미묘함”을 극복하지 못한 서비스는 일순간 귀찮음과 짜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 가곡이 답인데 헤비메탈을 틀어주면 좋아할까요? 어제 야근으로 좀 조용히 쉬고 싶은데, 대뜸 주식 떨어진다는 소리를 해대면 좋아할까요? (음, 더 와닿는, 자동화의 귀찮음과 짜증의 예를 들자면,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자동 기능들같은 것?)

 

해결책은 여전히 소비자의 몫

네, 저의 결론은 여전히 이 영역의 최종 해결자는 소비자 자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상기했듯이, 현재의 수준으로는)
오히려, 잘해주려고 덤볐다가는 본전도 못찾고 욕만 들을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러니, 뭔가를 잘 만들고 포장해 주기 보다는, 소비자들이 잘 소비할 수 있는 공간 또는 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프라이버시”? 이건 여전히 타협의 문제입니다. Big deal이 필요합니다. 서비스가 완벽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되려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캡춰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댓가를 주어야 겠지요. 물론,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서비스를 연결해 주는 용도로만 사용한다는 보장은 필수.
“미묘함”? 이것 역시 소비자들에게 열어주어야 합니다. 미묘함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열린 도구만 제공하고, 꾸미는 것은 소비자가 하도록 해야합니다. 열린 도구란, 컨텐츠, UI 등 모든 사용자 경험 환경을 아우르는 전체 시스템을 다 고려해야 합니다.

말이 그렇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여전히.
제 스스로는 아직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 g e m ☼ n g ]

(그림 원화: The Singing Butler by Jack Vettriano)

 

Update: 2012.2.27.
4년전 글입니다. 개인화에 대한 의구심으로 쓴 글인데, 요즘도 별로 나아진 건 없는 것 같아 옛날 블로그에서 복사해 봅니다. 이 글의 원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포스팅 시각은 원문과 맞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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